한국의 '깡패와 건달' 주먹으로 본 권력비리의 100년사 김영호 기자 2010.05.04 15:41


1.낭만파에서 정치강패로 전락


한국의 깡패와 건달

이성순(일명 시라소니)-공중머리 박치기, 김두환 (일명 잇뽕(한방))-어깨집고 양발차기, 이화룡 (일명 검은신사) 50년대 명동출몰의 황제, 이정재 (일명 마렌코프) 한국의 두산마를 꿈꾼 정치강패, 유지광 삼호회 등 조직의 귀재, 조양은 양은파 두목 3세대 주먹의 선두주자, 김태촌 서방파 두목-칼쓰기. 지금 소개한 사람들은 한국의 100년사 주먹의 대명사다. 이 주먹은 대를 물며 시대의 변화에 맞춰졌다.

 
깡패는 영화의 단골 출연작. 영화 속 강패는 그 단순함으로 우리에게 웃음을 전해주는 감초 역할도 하지만, 의리를 위해 목숨을 거는 멋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검찰 스폰서> 논란과 더불어 폭력과 권력의 공존관계를 파헤쳐 본다. <시사우리신문>은 김두환의 비서 역할을 하기도 한 정정웅씨와 그의 지인들(김동회, 이상욱), 당시 종로 상인들에게서 당대와 현재의 주먹 이야기를 들어본다.

 
주먹으로 먹고 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더 큰 조직을 찾게 되고 권력과 주먹이 공존하는 세상이 존재하기 시작한다.

 
<검찰 스폰서>관계도 이러한 사실이 존재한다는 이유에서이다. 정정웅씨는 김두환 의원 비서를 마치고 유정재, 유지광 밑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이후 정씨는 5공 시절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혹독한 고초를 겪기도 했다.

  다음은 이들의 말을 토대로 구성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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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 주먹시대는 일제 강점기부터다. 1930년대 일본주먹과 조선주먹이 양분된다.

일제 식민지 정책으로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도시로, 도시로 모이게 되고 시장이나 역 근처에서 불황자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사람들 중에는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시장을 중심으로 내노라하는 조직에서 일하며 여러 패거리가 난립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는 대학을 나와도 이러타할 일자리가 없어 학생패와 망나니패가 공존했다. 조선의 주먹은 많았지만 조직 수준까지 되지 못했다. 주먹세계의 말의 빌어 지역구 수준이었던 것이다. 

 
<전국구가 형성된 것은 언제였을까?> 

종로의 우미관 극장 주인은 '와카사키'란 일본인이었고, 기도 겸 배후세력으로 복싱으로 이름을 날리던 김기환 서대문 뫼관패 두목을 영입한다. 이후 와카사키는 김기환의 세력이 커지자, 일본인 서커스단에서 칼로 묘기를 부리던 미또리오 무사시를 영입했다. 

 
미또리오는 성격이 포악해 여성들에게도 폭력을 휘둘러 골칫거리로 전락했지만, 당시 우미관패의 꼬봉(?)이던 김두환이 미또오리에게 결투 신청을 해 이기고 말자, 그는 우미관을 떠났고 한 순간에 18세이던 김두환이 훌쩍 커 버린 것이다.

 
이 시기에 김기환도 경찰폭력 등으로 감옥신세를 져야 했고, 신마적 엄동욱이 홀연 만주로 떠나자, 비로소 김두환은 우미관을 중심으로 전국구에 버금가는 조직을 이룬다.

 
이후 김두환에게 도전장을 내민 패거리의 우두머리가 모두졌고 이후 우미관패에 합류하면서 비로소 조선 주먹의 전국구가 형성됐다.

 
정씨는 "김두환의 싸움 실력을 남자가 봐도 반할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으며 특히, 여러명과 싸울 때 남의 어깨를 짚고 발차기는 3명의 건장한 남자들을 단숨에 제압하기에 충분했다"고 회고했다.

 

<하야시는 누구?>

청계천 사이에 두고 혼마치깡이 있었던 본정3정목(현 충무로 3가). 이곳은 하야시(조선인 선우영빈)란 일본 주먹계의 우두머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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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는 일찍이 창시개명을 하고 어려서부터 일본에 넘어가 모든 것을 두산만에게 바쳤다. 두산만(도호야마 미쓰루)은 무사집안에서 태어나 야쿠자들을 양성한 대륙침략의 야심을 가진 자다.
 
그는 정치 그물로 손문과 김옥균에게 정치자금을 주기도 했다. 하야시는 그 아래에서 일을 봤고 조선의 침략의 야쿠자로 하야시를 보냈다.

 
하야시는 이런 일본 거물 두산만의 힘을 입고 조선의 종로, 명동, 충무로를 접수했다. 유흥가를 중심으로 돈을 거둬 조직적으로 성장시켰다.

 
<김두환과 하야시의 수표교 결투>

하야시는 한날 김두환에게 우미관패의 횡포가 극에 달했다며 3일 뒤 장충당에서 40여명씩 싸우자는 제의를 해 왔다. 김두환이 이를 수락했다. 하지만 하야시패는 하루 전날 기습을 하는데 이를 알게 된 김두환 패는 수표교에서 싸움을 벌였다. 무기면으로는 일본이 우월했다. 그러나 비장한 만은 김두환 패가 절박했다. 이 도중 인근 소방서에 포착돼 경찰이 나서 진화 됐다.

 
하야시는 이후 김두환을 불러 본정의 자전거 보관소의 이권을 가지게 됐다. 하야시를 김두환은 형님으로 모셨지만, 이는 경찰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서며 실제 단속도 많이 줄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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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이후 주먹, 4발의 총성>

이정재는 제3세력인 반 자유당 40인 중 1명 암살사건에 김동진을 끌어들이지만 이를 김동진이 고발한 것. 이에 단성사 영화관에 이석재가 김동진이 놀러 온 것을 알고 권총으로 4발을 발사해 살해했다.

 
이정재 사건은 허지부지 돼 버리고 검찰이 나서자 검찰마저 법복을 벗게 만들었다.

 
이정재의 위세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씨는 당대를 "공권력이 공존하는 시대"라며 "정치적인 앞잡이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사오입 개헌, 1957년 반 자유당 장충당 집회에서 조병욱씨의 연설에 폭력사태가 난무했다. 이 사건으로 동대문 사단 이정재의 행동대장 유지광이 체포됐다.

 
장충당 사건은 언론에서 '깡패'란 용어를 처음 사용하게 된 계기가 됐다.

 
이 시대 김두환이 정계로 떠난 종로는 심종현, 명동 이화룡.정팔, 소공동 홍영철, 광화문 장영빈, 서대문 표창수가 분할 점령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소공동의 홍영철파는 미군의 원조 물자지급에 경쟁 입찰을 협박으로 막고 어마어마한 돈을 챙겼다. 홍영철은 대한실업협회를 만들어 담합입찰로 다시 팔아 폭리를 취했다. 이른바 폭력주식회사로 불릴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이들은 1년에 20억 가까운 돈을 30%는 주먹패가, 20%는 군기관, 수사기관에서 가져갔으면 50%는 정치자금에 사용됐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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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혁명재판소>

 당시 시라소니를 영입한 명동파와 동대문파가 대립하고 있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동대문파는 이정재를 중심으로 화랑동지회를 말들어 서대문, 종로, 광화문 등을 포섭했다. 치열한 면동파와의 전쟁이 끝난 것은 경찰과 친분이 있는 이정재의 모략으로 명동파 전원이 무장해제됨에 따라서다. 

 이후 이정재는 화랑동지회를 이용해 경기도 이천에서 국회의원을 출마의 꿈을 자신이 정치강패로서 권력 2인자 이기붕과 손잡으며 그 해결사로 나서왔다. 자유당 이기붕은 서대문에서 승산이 없었다. 이에 이정재의 이천 출마를 강제로 막으면서 이정재와 이기붕의 사이는 멀어지게 된다.

 화랑동지회는 이후 임화수를 중심으로 움직이면서 정치야욕을 꿈꾸게 됐다. 임화수는 곽영주 경무대 경찰서장의 도움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양 아들까지 되면서 그 위세는 이정재의 위치와도 뒤 처지지 않았다.

 이후 군사 정부의 출헌으로 깡패세력들은 줄줄이 법정에 서게 되고 이정재와 임화수가 사형을 당하게 된다.

 이씨는 이에 대해 "당시 군부대가 정권을 장악했다는 소리에 모두 만세를 불렀지만, 오히려 군 부대의 정권창출 희생양이 되고 만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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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환 정치의 길>

1949년. 징용이 시작되고 주먹들도 일부 끌려갔지만 곳곳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등 일본으로서도 고민이었다. 전쟁 때문에 우미관 조직을 징용하는 대신 '반도의용정신대' 결성을 종용했다. 김두환은 고심 끝에 500여명의 주먹들이 모두 가입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6·25가 터지면서 우리 나라 주먹의 역사는 변화의 몸살을 앓는다. 

 일단 일본인이 빠져나간 명동은 이화룡, '시라소니' 이성순, 장천용 등 서북청년단이 주도권을 차지했다. 또한 김두한이 정계진출로 자리를 비운 종로는 '아이마스' 심종현이 자리잡았고, 동대문은 이정재, 광화문은 장영빈, 서대문은 최창수가 세력을 다투고 있었다. 

 이들 중 이정재는 자유당 정권과 결탁하면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정권의 도움을 받아 명동세력을 제거한 후에는 독보적인 1인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정재는 후에 자유당 정권의 버림을 받으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김두환은 잠깐 좌익에 섰다, 아버지의 죽음이 좌익에 의한 것임을 알고 우익으로 돌아서 각종 청년단을 이끌며 정치세력을 넓혀갔다.

  김두환의 세력조차도 테러에 가담하면서 ‘백색터러’라는 우익의 청년조직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후 그는 정치에 인문하게 되는데 그 계기가 화려하다.

  그는 이미 낭만파 주먹시대를 거쳤고 정치강패에 필요한 소양을 알게된다. 6·25전쟁을 거치고 자유당 정권이 뿌리를 내리면서 정통성이 결여된 정치권이 주먹세계의 물리적 힘을 이용하기 위해 추파를 던졌다.

  건달세계도 질적 변화를 겪으면서 이른바 주먹과 권력이 본격적으로 손을 잡는 ‘정치깡패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1954년 김두한의 정계입문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독재와 비리에 맞서 정치인 협객이 되겠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기 주먹의 퇴장. 신상사파vs호남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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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 18년 동안 주먹들은 '깡패소탕령'으로 인해 그 세력이 현저히 위축됐다. 그러나 1963년 민정이양 뒤 단속이 다소 느슨해지자 명동파 세력을 중심으로 차츰 회생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다시 기지개를 펴던 주먹계를 통일하고 권좌에 오른 이가 바로 이화룡파의 행동대장 출신인 '신상사' 신상현.

이 시기에는 또 이전까지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지방 세력, 즉 호남지역 출신 주먹들이 세력을 확장해나가기도 했다. '번개' 박종석과 김태촌, 오종철과 그 직계 후배인 조양은 등이 이 부류에 속했다. 그리고 이들이 주축이 돼 결성한 범호남파는 1975년 '사보이호텔 사건'을 계기로 호남의 전성시대를 열어간다. 

  이 사건은 유흥업소 주류공급과 업주들에게 받는 월정금을 둘러싸고 명동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범호남파가 사보이호텔의 신상사파를 습격한 사건으로 정통 주먹세계의 종말을 고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즉 이때까지 주먹세계의 불문율이었던 '정정당당한 주먹과 주먹의 대결구도'가 깨지고 사시미칼과 일본도라는 흉기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

 

<3기 주먹의 전성시대>

신상사파를 제치고 명동을 차지한 범호남파는 얼마후 분열과정을 거쳐 조양은의 '양은이파'와 사보이호텔 사건으로 새롭게 부각된 김태촌의 서방파, 이동재의 'OB파'가 삼각구도를 이루며 3대 패밀리를 형성했다.

이들은 산업의 고속발전과 더불어 강남을 중심으로 번창하기 시작한 유흥업소에 거점을 두고 건설현장 이권개입, 주류공급권 획득, 업소측으로부터 거둬들이는 정기적인 상납금 등으로 자금을 획득하고, 이를 통해 조직을 확장함으로써 '조폭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이즈음에 일어난 최대의 조폭사건은 87년 통일민주당 창당과정에서 조직적 방해 공작을 펼친 이른바 '용팔이 사건'으로 당시 권력의 핵심이던 장세동 안기부장이 개입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이 최대의 위기를 맞은 것은 90년 노태우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조직폭력배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령을 내리면서 부터이다. 보스급이 줄줄이 구속되면서 이들도 그 세력이 점차 약화, 지금은 '지역중심'에서 '업소중심'으로 세력 기반을 변화시켜 나갔다. 

  현재는 전국적 기반을 갖춘 대규모 조직은 거의 사라진 대신 군소세력들이 군웅할거에 들어간 상태다. 

 
<전국구 주먹과 ‘3대 패밀리’시대>

이정재 이후 약 10년간 패권을 차지한것은 ‘신상사파’ 신상현이었다. 오종철과 박종석( 일명 번개)이 양분하던 ‘범호남파’는 무교동 유흥가를 발판으로 세력을 키운 뒤 ‘신상사파’와 대결구도를 이룬다. 

  범호남파는 1975년 1월 2일 주류 공급권과 관내 유흥업소 상납금을 둘러 싸고 갈등을 벌이던 신상사파를 명동의 사보이호텔 신년회 현장으로 급습했다. 

  이 사건을 통해 ‘오종철파’의 행동대장이었던 조양은이 급부상 했고, 범호남파도 내부 분열을 겪는다. 내부적으로 수세에 몰린 ‘박종석파’의 행동대장 김태촌이 1976년 3월 무교동 엠파이어 호텔 후문 주차장에서 범호남파의 실질적인 보스 오종철을 칼로 난자해 불구로 만들었다. 

  이후 조양은과 김태촌은 3년간 쫓고 쫓기는 혈투를 벌였다. 이 시기에 오기준, 김태촌이 중심이 된 ‘서방파’와 이동재를 두목으로 한 광주 ‘OB파’가 급속히 세력 을 키워 당시 패권세력이었던 ‘양은이파’와 함께 ‘3대 패밀리 ’를 형성했다. 

  전국적으로 통하는 주먹이라는 의미의 ‘전국구 주먹시대’는 ‘3대 패밀리’를 비롯해 부산의 칠성파(두목 이강환), 대전의 옥태파(두목 김옥태, 2001년 사망), 대구 동성로파(두목 오대원), 수원파(두목 최창조), 이리 배차장파(두목 김항락) 등이 이끌었다. 

  이때부터 칼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잔인해지기 시작 했다. 이들의 활동무대도 상권 중심에서 대형 유흥업소 중심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채권·채무관계 ‘해결사’, 주류도매업, 공 사 입찰, 건축자재 공급권 등 다방면에 진출해 전성기를 누렸다. 

 

▲     © 시사우리신문편집국






기사입력: 2010/05/04 [15:41]
최종편집: ⓒ 시사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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